백합야(百合野)전투(553 A.D.)에 대한 몇 가지 단상. - I 정보


국고대사를 나름 관심갖고 자료를 찾다보면 "백합야전투"를 무난하게 찾을 수 있습니다.
여기의 "백합야전투"의 개요는 아래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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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투명: 백합야(百合野.)전투.
2. 발발일시: 서기 553년 음력 10월.(양력 11월 - 12월경.)
3. 교전국: 고구려 VS 백제.
4. 기록의 출처: 《일본서기》(日本書記.) 권 제19, 긴메이(欽明) 편.

5. 발생장소: 백합야.(百合野: 위치를 알 수 없음. 경기도 서북부 어딘가로 추정.)
6. 전투형태: 야전(野戰). 수성전 혹은 공성전이 아님.
7. 전투결과: 백제 승. 고구려 "퇴각".("쫓아가 물리쳤다."(追却.)라는 표현에서 고구려군이 궤멸되지 않았음을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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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백합야전투는 한국측 사서에는 언급이 없고, 일본측 사서인 《일본서기》에 등장하며,
현재 한국고대사를 연구하는 배경에서《삼국사기》(三國史記.)가 가지는 절대적 영향력에 의해,
삼국시대의 역사가《삼국사기》의 기록을 중심으로 편성되고, 그 결과 이 전투가 관산성 전투(554 A.D.) 및 황산(벌)전투(660 A.D.)만큼 비중있게 알려지지 못했다고 봅니다.

우선 "타국의 사실을 전해듣고 기록한" 《일본서기》 보다,"3국의 유산을 계승한" 한국측의 《삼국사기》를 한국내에서 우선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삼국사기》가 3국의 최종승자인 신라의 기록이 방대하고(신라 VS 백제, 신라 VS 고구려의 기록이 중심이 됨.), "고구려 VS 백제" 기록이 상대적으로 소략한 측면을 고려할 때, 《일본서기》의 한국관련 기록이 가지는 가치도 당연히 무시할 수 없다고 봅니다.


A. 백합야전투가 기록된 "배경"?

백햡야전투의 기록의 큰 특징은 전투기록을 "보고서"(REPORT)의 형태가 아닌, "전쟁상황을 목격한 대로 채록한" 형태이며,
이런 이유로 전쟁의 시작, 진행 그리고 종결상황을 마치 현장에서 목격한 것과 같이 선명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고구려군의 복장, 대화내용까지 기록됨.)

이런 기록이 가능한 이유 혹은 배경을 나름대로 추정하면, 당시 백제군 주둔지에 일본(야마토大和.)에서 파견된 관료 혹은 군인이 체류하였고, 이들이 전쟁상황을 목격하고 일본으로 귀국한 후, 이를 기록한 것이 《일본서기》에 반영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B. 백합야전투에서 "고구려군 5인"의 의미?

백햡야전투의 전개상황을 고찰하면, 우선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서기553년 10월, 백제군이 고구려(원문에는 고려高麗.)의 국경을 넘어 침공.
2. 고구려의 "백합야"(百合野.)에 백제군이 주둔하였고, 이후 고구려군이 이를 요격하기 위해 백합야에 도착.
3. 고구려측에서 5인의 군인이 백제군 주둔지에 도착하여 백제측 지휘관에게 "통성명"을 요구.
4. 백제측에서 "응수"한 후 고구려측에서 "재응수". 전투개시.
5. 백제의 왕자 부여창(夫餘昌.)이 고구려측 "용사"(勇士.)를 제압, 참수. 백제군의 사기가 크게 오름.
6. 백제군이 총공격 개시. 사기가 꺽인 고구려군이 "동성산"(東聖山: 위치미상.)까지 퇴각.

여기에서 "3번"에 등장하는 고구려군 5인의 복장을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여기의 5인은 모두 말을 타고 있는 기병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백제군과 고구려군 사이의 연락 및 통신을 담당한 전령일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1. 목 가리개 갑주를 착용한 1인: 고구려군 장교. 5인의 통솔자.
2. 징을 지참한 2인: 고구려군 전령.
3. 표범의 꼬리(가죽?)를 착용한 2인: 표범의 꼬리(가죽?)는 무기에 두른 것으로 추정. 전투병이나 하급장교로 추정.

그런데, 정황상 이 고구려군 5인과 백제 지휘관(백제왕자 부여창.)이 상호간 통성명을 한 것으로 미루어,
"1번"의 인물(목가리개 갑주를 착용한 인물.)이,
백제왕자 부여창에 직접 싸움을 건 "용사(勇士.)"(죽음을 맞이한.)일 가능성이 또한 있습니다.


C. 백합야(百合野.)의 위치는?

온라인상의 일부 자료들에는 백합야의 위치를 비정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나무위키』에서는 경기도 김포시 인근(김포평야?)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참고자료:『나무위키』, 「백합야 전투」, 2021년 12월 28일 오전10시 53분 열람.

개인적인 생각으로, 《일본서기》에 묘사된 백합야의 모습(비옥한 평원이 끝없고 적막하였음.)을 고려할 때,
이런 지형은 평활지가 널린 경기도 서부에서는 매우 흔한 지형으로써, 이를 김포로 단정할 수 없다고 봅니다.

위치 비정은 우선, 백합야전투가 발발하기 이전(서기551년 전후.) 백제-신라-가라의 연합군이 고구려를 침공하여, 특히 백제가 "한성, 평양(남평양?) 등 6군"(지금 남한산, 북한산 인근.)을 점령하였지만 철수하였고, 백제군이 철수 후 다시 고구려의 백합야를 침공하였던 배경을 고려하여, 백합야의 위치는 서울틀별시 인근에서 멀지 않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일본서기》에 백합야의 위치는 기록되지 않은 이유로, 정확한 위치를 밝혀내기는 어렵고, 기록의 정황을 토대로, 몇 지역을 유력한 곳으로 지목할 수 있는데,

대체로 경기도 파주시- 경기도 고양시 - 서울 강서구 - 경기도 부천시- 경기도 시흥시를 연결하는 선상에 위치했을 가능성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다만 『나무위키』등에서 추정한 김포설은 개인적으로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위치에 대한 상세한 고찰은 다음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