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675년경 발발한 매소성 전투(買肖城: 현재 경기도 양주로 비정.)는 나-당 전쟁(羅-唐 戰爭. 대체로 서기668년에서 서기676년까지의 기간으로 정의.)에서 상당히 비중있게 언급되는 전투입니다. 이 전투에서 신라는 "20만"(혹은 4만.)으로 추정되는 당군을 신라군이 격파한 전투로써, 이 전투를 분기점으로 당제국의 신라침공계획이 좌절되었으며 "신라의 삼국통일"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역사적 사실로써 설명되고 또 부각되는 전투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이 전투는 대체로 아래의 의미로 세분하여 파악할 수 있습니다.
1. 신라가 동맹상태였던 당제국과 군사적으로의 충돌.
2. 당제국의 궁극적 목적이 "3국의 정복"이었음.
3. 신라가 "2번"의 목적을 가진 당제국과 전투하여 승리.
대체로 위의 3가지 의미는 "사실의 해석"이 아닌 엄연한 "사실"로써 우선 신라(新羅: 57 B.C. - 935 A.D.)가 당제국(唐: 618 - 907.)과의 동맹체제에서 일방적인 수동적 위치가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여기에서 신라의 궁극적 목표가 당제국이 추구하는 국제질서 혹은 대외정책과 일치하지 않음으로써, 신라의 "자체적인 대외정책"이 표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여기에서 언급되는 "나-당 전쟁"은 민족주의적 역사인식, 다시 말씀드려 "민족주의사관"의 관점에서 대체로 거의 언급되지 않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본인의 견해로는 민족주의적 역사인식에서의 신라는 "외세(당제국.)를 이용"하여 "동족"인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켜, "만주를 포기한 불완전한 통일"을 함으로써, 자주성을 상실한 국가는 "도그마"가 형성된 이유로, 신라가 서기 668년(고구려 멸망.) 이후 당제국의 동방정책과 충돌했던 일련의 상황을 무시하거나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회사(社會史.)의 측면에서 대체로 3국시대 중/후반(서기5세기 - 7세기경.)의 3국은 그 국도(國都.)가 평양(고구려), 경주(신라), 부여(백제)로써, 상당히 근접하게 되었고 이런 이유로 3국의 정치적 사회적 교류가 타지역보다 빈번하게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충분히 생각할 수 있으며, 이렇게 형성된 "사회/문화적 측면에서의 동일권역의 형성"을 신라왕국이 "정치체제의 단일화"를 이룩함으로써, 한국사(韓國史.)에서 단일정치제제수립의 "기초"를 구축하였다는 측면에서 신라의 3국통일을 평가할 수 있으며, 이 3국통일의 "시작"이 여기의 "나-당 전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런 나-당 전쟁의 기저에는 3국의 영역이 포함된 일련의 "사회 권역"이 당제국의 "사회 권역"과 차이가 있었던 이유로, 신라가 국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당제국의 대외정책에 무조건 편승하지 않고 군사적 충돌를 감수하였다고 생각하며, 여기의 "사회 권역"은 "사회 정체성"(identity.) 형성의 배경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신라의 3국통일은 한국사에서 한국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정립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여기에서 언급되는 나-당 전쟁 및 매초성전투의 "상황" 및 "평가"에 대한 수정주의적 견해가 존재하는데, 이것은 종래의 전통주의적 3국통일론 혹은 민족주의적 관점에서의 3국통일 부정론과는 별개의 견해로써, 나-당 전쟁 및 이 전쟁의 일부인 매소성 전투의 상황에 대한 상세한 고찰을 통해 이 나-당 전쟁이 당시 당제국의 입장에서 "비중을 두는" 전쟁이 아니며 당제국의 당시 대외정책의 1차적 문제는 당제국의 서쪽에 위치한 티베트(토번(吐蕃.))와의 군사적 충돌이었으므로, 신라와의 전쟁에 소극적으로 임한 것이 결국 신라의 승리의 원인이 되었다는 견해입니다. 여기에는 매소성전투는 대규모의 전투(會戰.)가 아니며 신라군이 당군을 "기습하여 쫓아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토대로 [1] 이 전투가 "대규모 전투"가 아닌 것으로 인식하는 견해 역시 존재합니다.
개인적인 견해로, 여기의 "수정주의적 견해"(당제국의 소극적 응전론.)은 당시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는 목적에서, 그리고 보다 "국제적인 시각"에서 파악하려는 관점에서 기존의 전통주의적 관점(3국통일 긍정론.)에서 강조된 "신라의 활약"에 대한 배타적 긍정론을 수정하는 의미에서 이 수정주의적 견해가 평가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런 견해가 신라가 고대 한국의 "사회 권역"을 단일한 정치체제로의 통합을 추진한 상황 및 여기에서 기인하는 당제국에 일방적으로 편승하지 않는 "정체성" 형성의 사실이 부정되지는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및 열전(列傳.)에 수록된 인물 중에는 여기의 나-당 전쟁에서 활약한 인물들이 수록된 것을 고려할 때, 이 전쟁의 가치가 "당시대"에 중요한 평가를 받았을 가능성을 충분히 추정할 수 있습니다. 아래의 구절에서 언급되는 원술(金元述: ? - ?.)은 김유신의 아들로써, 나-당 전쟁 초반에 당군에게 패배하였지만 매초성전투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고 《삼국사기》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전략)
675년 오늘날 경기도 양주 지역인 매초성(매소성. 게시자주.) 방면에 본거를 둔 이근행 당군은 한강 하류를 향한 압박을 계속하였다. 당군의 압박에 신라군의 저항 형태로 전개되던 양상은 675년 9월 29일 매초성 전투를 고비로 반전되었다.
매초성 전투에서 당군은 패배하고 퇴각하였다. 전번의 수치를 씻기 위해 절치부심하던 원술이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부모에게 용납받지 못함을 한하여 그 뒤에도 벼슬하지 않고 평생을 마쳤다. 78 [2]
(하략)
[1] 《三國史記》 券 第7, 新羅本紀 第7, 文武王(下) 15年 秋9月29日 條:
李謹行率兵二十萬, 屯買肖城. 我軍撃走之, 得戰馬三萬三百八十匹, 其餘兵仗稱是.
(역: 이근행이 병 20만을 지휘하여 매소성에 주둔하였다. 아군이 공격하여 달아났다, 전마 3만380필을 얻었고, 그외 병장기가 그만하였다. )
[2] 노태돈, 2009, 『삼국통일전쟁사』, 초판6쇄, (서울: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8). p.266.
(『三國史記』 권43 김유신전 하.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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