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의 측면에서 "동아시아"와 "동아시아 이외의 세계"의 교역은 대체로 동아시아 이외의 세계의 "활동"에 의해 교역이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기를 구획하면 대체로 서기 15세기 이전 교역을 주관한 세력이 아랍세계였고, 15세기 이후에는 유럽세력이 그 교역을 주관했다고 이해할 수 있는데, 이는 일련의 "대륙민족주의" 혹은 "범민족주의"의 관점에서 동아시아의 세계사적 비중을 폄하하는 견해로 인식될 수 있으나, 이것은 동아시아사회와 동아시아 이외의 사회(아랍 및 유럽사회.)의 자연적, 사회적 환경과 가치관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근대이전 농경이 주 산업이었던 세계적인 상황에서 광활한 국토 및 풍부한 인력에 기인하는 농업생산력의 절대적 우위를 장악한 중국사회는 그런 배경에 기인하는 일련의 "중화사상"의 태동으로 중국 이외의 세계에 대한 관심과 교역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고, 중국과 인접한 동아시아사회 역시 이 중국과의 교역체제(일련의 사대교린 및 조공책봉.)에 만족함으로써, 중국 이외의 세계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진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서기 15세기 이후의 유럽세계에서 추진된 교역은 그 동안 "축적된"(마르코폴로의 기행문 등에 의한.) 정보 및 행해술, 그리고 무기기술의 발달 등에 의해 이전 시기보다 급진성이 확인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씀드려 서로 상이한 문물이 타 지역을 통한 "점진적인 전파"를 통해 그 문화적 충격이 완화되는 특성이 아닌, 발달된 기술 및 정보에 기반한 상대적으로 신속한 해상교역이었으므로, 유럽세계의 문물이 완충되지 않고 동아시아세계로 유입되었고, 그것이 동아시아의 가치관과 충돌하면서 그 교역을 제한한 결과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사회가 이런 이유로 아편전쟁(1842.) 이전까지 중국남해의 광저우(廣州.) 로 그 대외무역을 제한한 사실이나, 일본이 그리스도교의 전래를 엄금하여, 나가사키의 고립된 지역에 "상업적 교역"에 국한한 네덜란드와의 교역에 머무른 사실이 대표적인 예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사회의 경우, 유럽세계와의 접촉이 미비했던 이유로는 조선사회 내부의 세계인식의 한계 및 유럽세계의 조선에 대한 관심의 결여가 복합적으로 적용된 경우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대교린의 외교정책에 의해 조선 인접국인 중국과 일본과의 교역에 만족했던조선사회의 상황 및 유럽사회의 교역의 성격(향신료 무역.) 등에 의해 "양자상호간 관심의 결여"가 형성되었고 그것이 인접한 중국과 일본에 비해 조선사회가 더욱 고립된 상황으로 이행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배경"에서 서기 17세기경 세계 해상무역을 장악한 네덜란드가 (정확히는 네덜란드 연합동인도회사.) 조선사회에 13년간 체류하고 탈출한 하멜 일행의 보고를 통해 조선사회와의 교역을 추진한 사실이 이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를 여기에서 상세히 고찰할 수 없지만, 교역의 무대를 최대한 넓혀 이익을 창출하기 위한 기본적인 교역정책관 이외에도 하멜보고서 곳곳에 나타나는 조선사회의 특성이 네덜란드의 교역정책에 이득을 가져올 것이라는 판단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네덜란드가 구체적으로 어떤 품목을 교역하려고 하였는지 상세한 고찰이 필요할 듯 하나, 네덜란드가 조선과의 교역을 추진하면서 "선박 한국호"(COREA.)를 출항시킨 사례를 나름 생각하면, 하멜의 보고서에 언급된 조선사회의 특산품을 중심으로 우선 조선과 직접접촉을 통해 조선정부와 협상을 통해 그 교역정책을 정립하려 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잘 알려진 사실과 같이, 네덜란드의 조선과의 교역정책은 우선 일본정부와 일본에 파견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측의 반대로 조선과의 교섭이 추진되지 못하였습니다. 개인적인 견해로 이것은 우선 조선왕국의 대외교역이 압록강 혹은 서해의 북방항로를 통한 중국과의 교역 및 부산의 왜관(倭館), 쓰시마(對馬島)가 중심이 되는 일본과의 교역경로에 전적으로 정체되어있어 네덜란드의 입장에서 "일본을 통한 조선과의 간접적 접촉"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배경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멜보고서가 네덜란드의 조선에 대한 정보과 관심의 증가에 기여하였으나, 그것이 직교역에 필요한 정보를 담고 있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서적 『하멜표류기』에는 네덜란드의 조선과의 교섭시도에 대해 중국과 일본의 반대가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하멜의 저술이 아닌 후대의 연구결과로써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왕국은 조선왕국대로, 유럽사회는 유럽사회대로 상호간 관심이 결여되어 유럽사회에서 조선에 대한 지속적인 정보획득이 아닌 몇몇 일행의 표류기를 통해 조선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고 있었으므로, 조선과의 교섭이 추진되지 못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전략)
하멜이 귀환한 후 통상을 트려는 새로운 시도가 있었지만 바타비아(자카르타: 네덜란드 연합동인도회사 소재지, 게시자주.)는 그러한 계획의 반대에 부딧쳤다. 아마도 일본이나 중국 정부가 반대했을 것이다.
우리가 일본에 무역 거점을 갖고 있는 한 조선과 거래를 할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그것은 중국인들이 우리가 조선에 가는 것을 참지 않을 것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일본의 시기심이나 불신을 야기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는 결정이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각으로 그렇게 해야 했으나 시간이 흐른 후 그것이 성공하여 미래에 어떤 일이 생기게 될지는 모를 일이다.
선견지명이었다. [1]
(하략)
[1] 헨드릭 하멜 저, 김태진 역, 『하멜표류기』, 초판14쇄, (파주:서해문집, 2018).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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