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국의 대외인식에대한 또다른 고찰.(2019.9.6.) 독서록

조선사회에 대한 인식은 대체로 "폐쇄적", "수직적" 사회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이런 견해가 잘못된 견해는 아닙니다. 이런 대외인식 및 사회인식은 우선 조선 뿐만 아니라 근대이전 동사양에서 거의 공통적으로 발생하는 경우로써, 당시의 사회의 특성에 기인하는 측면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으로 중세이전 동아시아사회에서의 우주관 및 세계관은 당시 이를 정확하게 관측할 수 있는 방법과 기구가 거의 없던 이유로, "천하의 중심"이 기본이 되는 우주관 및 세계관이 형성되었고, 이런 이유로, 중국 이외의 세계에 대한 관심이 저조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조선왕국으로 하여금 중국 및 인접국(만주, 달단, 일본, 류큐 등.) 이외의 세계에 대한 관심의 저조 및 정보획득의지의 결여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비단 한국사회의 인식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대다수의 사회가 이런 배경에 기인하는 우주관 및 세계관이 지배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일본 및 중국의 경우 역시 대다수의 교역은 동아시아 외부세계의 해상진출 등에 의해 형성된 경우로 볼 수 있습니다. 일례로 아랍 및 유럽세계가 오래전부터 그 존재를 인식하고 교류를 추진하던 중국사회의 경우, 그렇게 교류가 추진되는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진출의지가 희박했다고 판단할 수 있는데, 근본적인 이유는 중국사회에 내재한 "천하의 중심이 중국"이라는 중화사상에 기인한 경우로써, 이것은 서기 1842년 전후 아편전쟁을 통해 중국사회가 일련의 충격을 받기 전까지 지속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경우 역시 동아시아 외부세계와의 접촉은 일본사회가 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진출한 경우보다는 유럽세계가 그들이 인식한 세계에 기초하여 그 필요성에 의해 일본과 교섭을 추진한 경우로써, 특히 당시 일본사회에 변화를 유발할 수 있는 그리스도교의 전파에 큰 경계를 가지고 그 교역을 제한한 사례를 고찰할 때 일본 역시 중세적 인식에 의해 일련의 쇄국정책을 추진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위의 사례를 고려할 때 조선왕국 내부의 사회 역시 조선왕국의 사회의 특성인 "농본"(農本)의 이데올로기 및 성리학과 연관된 "화이관"(華夷觀), 그리고 동아시아 외부세계(유럽 등.)의 한국에 대한 막연한 인식 및 당시 향신료 무역로의 변방에 위치한 특성으로 인하여 한국의 쇄국적 상황이 지속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서기 17세기경 세계 해상무역을 장악한 네덜란드공화국이 조선왕국과의 직교역을 추진하고자 선박 "한국호"(COREA)를 건조한 상황(1668.)에 대해 당시 조선왕국의 직접적 입장이 확인되지 않은 이유로 당시 조선의 쇄국성을 쉽게 논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당시 네덜란드공화국의 조선왕국과의 무역정책에 대해 당시 일본(도쿠가와막부) 및 동인도회사 일본지부가 한국과의 교역추진을 막은 사례가 있기 때문에 이 당시 조선왕국의 직접적인 입장을 현재로는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래의 부분은 당시 조선사회에서 "낮선 외국인"(동아시아 외부인에 대한 인식.)에 대한 호기심을 하멜이 기록한 부분입니다. 여기에서는 승려를 언급하고 있는데, 대체로 조선사회에서 하멜 일행에 대하여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하멜이 기록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최소한 "두려움에 의한 기피"의 입장이 당시 조선사회에 조성되어있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멜의 저술 여러 곳에서 확인가능하지만 유배된 하멜의 통제를 담당한 관료들 중에는 하멜에 매우 호의적이면서 이들이 속히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바랬던 관료도 존재하였습니다.

(전략)
우린 스님들과 사이가 가장 좋았는데 그들은 매우 관대하고 우리를 좋아했으며, 특히 우리가 우리 나라나 다른 나라의 풍습을 말해 주면 좋아했다.

그들은 외국 사람들의 삶에 대해 듣기를 좋아했다. 만약 그들이 원하기만 했다면, 그들은 밤을 새도록 우리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을 것이다. [1]
(하략)

[1] 헨드릭 하멜 저, 김태진 역, 2003, 『하멜표류기』, 초판 14쇄, (파주:서해문집, 2018). p.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