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 『홍대용의 실학과 18세기 북학사상』에서 언급되는 "실학" 및 "북학"이데올로기는 조선왕국의 전기 및 중기를 지탱한 성리학 및 여기에서 파생된 세계관, 사회관, 우주관 등에 대한 재고의 입장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으로 사회체제가 붕괴되어 그 사회를 변혁해야할 동기가 직접적인 원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당시 서유럽의 문물이 동아시아에 파급되고 그것이 중국을 통해 조선사회에 파급되면서, 이 "변화"의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한 요소가 되었다고 봅니다.
서기 19세기 중후반, 구체적으로 조선왕국이 근대적 국제질서의 일원에 편입된 서기 1876년 전후의 조선사회에는 유럽열강의 정치/군사적 진출에 대하여 신속히 조선사회가 유럽의 문물을 수용하여, 이를 토대로 근대화를 이루어야한다는 논의가 발생하였습니다. 서적 『세계외교사』(김용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에는 이 논의에서 (개화파의 형성의 배경.) 박규수(朴珪壽: 1807 - 1876.)의 의미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서적에서는 박영효(朴泳孝: 1861 - 1939.)의 회상을 언급하면서 박규수가 "연암집"(燕巖集)을 강의하였는데, 이 때 모인 인물들이 한국사에서 잘 알려진 개화사상가들이었다고 합니다. 여기의 "연암집"은 20세기에 간행된 서적이 아닌 연암 박지원의 저서를 통칭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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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효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그런 새로운 사상은 나의 일가 박규수 집 사랑에서 나왔소. 김옥균(金玉均), 홍영식(洪英植), 서광범(徐光範) 그리고 내 백형(伯兄 朴泳敎)하고 제동 박규수 사랑에 모였지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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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용구, 1989,『세계외교사』, 전정판8쇄, (서울: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p.265.
이 부분에서 우선 박규수가 북학사상가인 연암 박지원의 이데올로기를 계승하였고, 그것으로 개화사상가들을 양성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최소한" 실학, 그 중에서도 북학(北學)과 서기 19세기 발생한 개화이데올로기가 박규수와 연암집 다시 말씀드려 연암 박지원의 이데올로기를 통하여 연결되었음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우선 박규수가 박지원의 손자로써 박지원의 이데올로기를 계승했을 개연성은 충분합니다. 여기에는 다소 구체적으로 고찰할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서적에서도 언급한 것과 같이 서기 18세기 실학 및 북학은 성리학의 재고를 통한 사회변화가 목표였고, 이를 위한 수단으로써 중국을 통해 유입된 서유럽의 문물을 수용하는 모습이었고, 여기에서 성리학과 중국에 대한 가치관이 존재하고 있으며, 개화이데올로기는 서유럽의 문물을 통해 근대화를 지향한 특성을 고찰할 때, 성리학 및 중국에 대한 가치관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표면적으로 볼 때 두 이데올로기는 표면적으로는 연속성이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기 18세기 발생한 실학 및 북학의 근본에 존재하는 "변화"의 개념이 조선사회 지식층의 인식변화를 유도하였고, 그것이 서기 19세기의 국내/외적 상황의 인식 및 유럽의 문물의 적극적 도입을 주장한 개화사상가들의 인식의 배경이 되었음을 상정할 수 있다고 봅니다. 다시 말씀드려 개화사상가들에게서 유럽의 문물에 대한 일련의 "문화적 충격과 저항"이 상대적으로 적게 나타나는 현상의 배경이 서기 18세기 이래 형성된 "배경"의 영향이 한 측면으로 작용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이 "변화"의 가치관을 실행하는 수단을 서기 18세기에는 "중국"을 통하여 마련하려 하였지만, 서기 19세기에는 "유럽"을 통해 마련하려 하였다는 것이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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