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 - 1805.)은 실학 및 북학의 대표적인 인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여기의 "북학"이 청제국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발달된 문물의 적극적인 도입을 주장한 학파인데, 박지원 역시 청제국을 방문하고 그 발달된 문물의 적극적 도입을 통해 사회의 개혁을 주장하였습니다.
서기 18세기, 다시 말씀드리면 조선왕국 중-후기의 시기인 서기 17세기 및 18세기의 이데올로기는 조선왕국 전-중기인 서기 15세기 및 16세기의 이데올로기와 일정한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조선왕국 전기 및 중기 조선사회를 강력하게 지탱하던 성리학적 가치관이 서기 17세기경부터 서서히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경우는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의 영향으로 전란에 휩싸인 조선사회체제가 붕괴되면서, "사회의 변화"와 "사회의 안정"을 지향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구축하려는 "동기"가 그 중심에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런 "시도"의 과정으로, 당시의 동아시아사회에 유입되던 유럽의 가치관(과학, 종교 등.)이 일정한 참고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기존의 성리학의 "재인식"을 통해 성리학 혹은 유교의 "본래의 모습"을 찾아(일련의 "초심"을 찾아.)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는 동기 역시 있었습니다.
북학은 이 중에서 대체로 "외부"의 가치관이 강조되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앞서 언급한 실학 및 북학의 형성요인 중 "외부적 요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선사회의 "정체성"을 타개하기 위하여 외부 특히 청제국의 발달된 문물에 특별히 관심을 보이고 이의 적극적 도입을 주장한 측면을 고려할 때, 조선사회의 "고립된 변화"를 경계한 측면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는 일정한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청제국을 통한 문물유입"의 측면에서 이것은 "중국"과 "세계"의 개념이 혼재해있음을 알 수 있고 이것은 "개방성"을 표방하는 동시에 "한계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이것이 "시대의 변화"를 이끈 힘이 되었고, 또 "중국을 통하여 중화사상을 탈피"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도 사실이므로, 사회사의 측면에서 일정한 가치를 부여해야한다고 봅니다. 아울러, 박지원이 청제국에서 목격한 "벽돌"과 "수레"의 적극적 도입과 활용을 주장한 사례는 박지원이 "청제국"을 인식하는 관점이 "천하의 중심"의 의미와는 일정한 거리가 있으며, "문물 도입의 공간"의 의미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중화를 존숭"하는 의미가 아닌 "중국의 문물을 도입활용하여 국가를 발전시키는"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서적 『홍대용의 실학과 18세기 북학사상』에는 박지원이 청제국에 체류하는 중 "청제국의 모든 모습"에 관심을 보인 일련의 일화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는 서기 19세기후반 조선사회 내의 개화사상가들이 서유럽의 문물에 큰 관심을 표방한 것과 유사성이 확인됩니다. 물론, 개화사상가들의 이데올로기가 이 북학과 단절되지 않았던 것 역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략)
그는 연경으로 가는 도중, 잠깐 조는 사이에 낙타가 지나갔다는 말을 듣고서 매우 안타까워하였다. 그는 자신을 깨우지 않은 시종을 크게 나무라면서, '다음부터 처음 보는 것이 있으면 내가 졸거나 식사할 대라도 반드시 알리라'고 다짐하였다. 3)
이는 새로운 풍물에 대한 그의 강한 호기심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그런데 그 호기심은 단순한 호사가적 취미라기보다는 외부의 객관세계에 대한 강렬하고도 지속적인 관심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하략)
김문용, 『홍대용의 실학과 18세기 북학사상』(서울:예문서원, 2005). p.235.
(「熱河日記 . 商樓筆談」, 166면 하. 참조.)




최근 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