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 및 연합군의 "재반격작전"(1951. 2.) 개시 이후 전선이 다시 북상하면서 현재 휴전선과 비슷한 전선이 구축되고 있는 상황에서, 휴전회담이 서기 1951년 7월경 시작되었고, 이런 상황이 연합군의 "추가적인 북진"을 스스로 철회하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견해로, 전쟁의 당사국이었던 한국에게 있어 "휴전"은 "제2의 분단"이면서, 남침을 감행한 북한정권이 "존속"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정부차원에서 강력한 "휴전반대" 입장이 국내외적으로 표방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런 "배경"이 당시 한국정부(이승만대통령.) 주도로 "반공포로 석방"(1953. 6. 18.)이 기습적으로 추진된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주목할 것은, 서적 『6.25 바다의 전우들』에도 언급되었듯, 이 "휴전반대" 여론이 당시 한국사회의 "입장"이었던 것으로써, 물론 당시 한국정부의 방침이 정책적으로 알려진 측면도 존재하지만, 6.25전쟁을 유발한 북한에 대한 "반북"(反北)정서, 그리고 국가 존망여부에 대한 "위기"의 심리 역시 강하게 작용하였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대통령이 국군통수권자로써, 그리고 군사적 정서에 의하여 당시 한국군의 입장은 "휴전 결사반대"였고,(일선 전장의 장병들의 심리는 약간 차이가 있을 수 있음.) 서적 『6.25 바다의 전우들』의 저자 역시 그런 입장이었을 가능성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습니다. 서적 중간중간에 보이는 "휴전중 연합군의 추가적인 북진계획이 밴플리트 미8군사령관등에 의해 언급되었지만 리지웨이(당시 연합군 총사령관.)에 의해 무산되었다."라는 내용이 언급되어있는데, 개인적인 견해로 저자 역시 이런 입장을 강조하는 측면을 확인할 수 있다고 봅니다.
대표적으로 서적에서 언급된 추가적인 북진계획은 대개 2가지로 정리할 수 있는데, "전전선을 대동강 - 원산 선으로 북상"시키는 안 [1] 과, "중동부전선을 강원도 통천-평강 선으로 북상"시키는 안(현재의 휴전선보다 약 10km 북상.) [2] 이었는데, 연합군사령부에 의해 기각되었습니다. 더 이상의 확전을 방지하고 휴전의 국면에 집중하겠다는 입장을 연합군사령부에서 확인할 수 있으나, 추가적인 북진계획이 "휴전회담"에서 유리한 입장선점의 초석이 된다는 측면에서 개인적인 견해로 당시 국군 및 연합군의 추가 북진계획의 실행이 필요했다고 생각합니다. 휴전회담 진척되면서 전선이 교착되고 결국 "서울에서 불과 수십 킬로미터"거리에 휴전선이 위치하는 결과로 이어진 면은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긍정적인 결과는 아닙니다.
(전략)
밴 플리트 장군은 한국을 떠나면서 1951년 봄에 공산군을 괴멸시킬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을 몸시 아쉬워했다. 당시 병참(兵站) 한계에 직면한 중공군은 불시에 반격을 받고 궁지에 몰려 있었다. 밴 클리트 장군은 『라이프』지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쉽게 연승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워싱턴 당국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국무부는 우리가 38도선에서 멈출 것임을 공산군에게 미리 통보한 상태였다.
(중략)
그러나 우리의 정책결정자들이 허락만 한다면 신임 8군사령관인 테일러 장군은 나와 마찬가지로 쉽게 기회를 붙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극동에서 한국문제가 정치적으로 해결될 가망은 없었다.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자들이게 밀리면 우리는 결국 패배한 것이다. 두려울 게 무엇이란 말인가?"34 [3]
(하략)
[1] 최영섭, 『6.25 바다의 전우들』(서울:세창미디어, 2013). p.195.
[2] 같은 서적 p.219.
[3] 같은 서적 pp.224 - 225.
존 톨랜드, 김익희 역, 『6.25 전쟁』제2권, 도서출판 바움, 1991, p.402.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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