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사회의 일련의 "현상"이 발생하면, 그 현상에 관련된 문제가 발생하고 그것의 해결을 위한 조치가 뒤따르게 되는데, 이런 절차는 그 문제를 "예견"하고 관련 조치가 언급되는경우보다는 그 문제의 "발생", 그것도 그 문제가 지속적으로 발생하여 그것의 심각성이 인식되었을 경우 조치가 언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른바 "재만조선인"(일제강점기 전후 만주 이주 한국인.)문제는 식민지 치하의 한국 혹은 식민통치자였던 일본제국만의 문제가 아닌 중화민국의 문제이기도 하였는데, 지난번 발췌문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중화민국의 입장에서 재만조선인은 "일본제국의 선발대" 혹은 "공산주의확산의 원인"으로 인식되어 탄압대상이 되었으며, 서적에서는 이 문제를 중점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서기 1930년대는 일본제국의 만주지역에 대한 관심과 야욕이 노골적으로 표출된 시기입니다. 대표적으로 잘 알려진 사례가 "만주제국 수립"(1931.)으로써, 일본제국의 철저한 위성국가 혹은 사실상의 종속국가로써 수립되었고, 이 사건은 "중-일 전쟁"(1937 - 1945.)의 전조현상으로써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와같은 서기 1930년대 일련의 일본의 중국침략사건으로 인한 영향은 자연스럽게 만주에 체류한 한국인에게도 끼치게 되는데,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일본제국과의 군사적 충돌에서 패전한 중국군의 보복성 탄압으로써, 이것이 학살과 약탈로 이어진 사실이 서적에 언급되어있습니다. 물론 서기 1930년대 중-일간 충돌이 표면화되면서 한국사회 내 "배화"(排華) 이데올로기에 의한 중국인에 대한 가해사례 역시 언급되어 있습니다.
아울러, 일본제국의 강력한 영향하의 만주제국(1931 - 1945.) 수립이후 만주에 체류한 한국인의 처우는 대개 그들을 만주국의 주민으로 간주하고 추진되는 정책들 및 그 문제점(한국인의 정체성 말살.)이 당시 언론에 언급된 사실이 서적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만주제국" 수립 이후 만주에 체류한 한국인 문제는 "일본제국과 중화민국"의 문제에서 "일본제국과 만주제국"의 문제로 변화하였고, 전자의 경우, 중화민국의 "반일, 반공 이데올로기"의 희생이 되었고, 후자의 경우 "일본제국의 통치하 한국인의 정체성 말살"로써, 열강의 탄압의 희생대상으로 계속 이어졌다고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인 견해로, 이 문제는 우선 한국을 식민통치하던 일본제국의 만주이주 한국인에 대한 정책을 고찰하지 않을 수 없다고 봅니다. 한국인이 일본제국의 통제하 놓인 상황에서 만주에 체류한 한국인문제도 일본제국의 정책에 의해 영향을 받은 측면은 충분히, 그리고 명백히 추측할 수 있는데, 물론 당시 만주지역의 사회안정(치안)문제가 매우 열악하여 집단범죄단체인 "마적"(馬賊)이 횡횡하였던 측면도 고려할 수 있지만, 일본제국이 만주에 체류한 한국인을 "정책적"으로(주로 일본제국의 만주에 대한 야욕의 선발대.) 이용하였고, 아울러, 만주에 이주한 일본인에 비하여 정책적 차별을 당한 측면이 서적에서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되려 만주이주 한국인의 "반일"이데올로기를 감시탄압하기 위한 조치가 서적에 언급되고 있으며, 물론 서기 1930년대에 해당하지 않지만 대표적인 사례로써 일본제국에 의해 한국인이 대거 희생된 "간도참변"(1920.)을 언급할 수 있습니다.
(전략)
또한 일본인의 만주 이민에는 매호당 1천 원과 20정보를 보조하는데 조선인 이민에 대해서는 그렇게 못할망정 최소의 여비와 거주비 등은 부담할 것도 요구하였다. 그리고 경작지 면적에 대해 매호 평균 3정(町) 6단(段) 3무(畝)는 조선과 일본 내지에 비하여 나은 편이지만, 일본 이민자의 20정보에 비하면 극히 빈약하다면서,
"조선 농촌의 특질인 영세경작 농노제도를 그대로 새 토지에 옮기는 것이 아닌지 우려되는 바"라며, "이민 당국의 맹성을 촉구"하였다. 96 [1]
(하략)
이명종, 『근대 한국인의 만주 인식』(서울:한양대학교출판부, 2018). pp.408 - 409.
《조선일보》, 1937년 12월 17일, 1면 사설 「집단부락과 이민대책」.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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