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고구려(高句麗: 37 B.C. - 668 A.D.)의 발상지 및 초기 중심지는 "압록강 유역"으로써, 여기에는 평안북도 강계(江界) 및 지린성 지안(輯安), 랴오닝성 환런(桓仁)이 포함됩니다. 대개 고구려는 자신들의 시조를 "부여"(夫餘)에서 왔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이는 당시의 1차적 사료인 광개토왕릉비에 언급되어 있으며 당시와 가까운 시기 저술된 사서에 "부여의 별종" 등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울러, 고구려의 발상지 및 중심지, 그리고 주요 활동영역은, 한반도 중북부, 만주지방의 서남부, 연해주 남부(두만강 유역)로써, 당시 기준으로 "중국"이라는 지역(만리장성 이남.)의 "바깥"이었습니다. 특히 고구려가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발전하고, 대외적으로 고구려의 정체성이 알려진 서기 5세기 전후 고구려의 중심지는 한반도 북부의 "평양지방"으로써, 이곳은 과거와 현재의 기준으로 중국의 영향권으로 볼 수 없는 곳입니다.
고구려는 최전성기로 간주되는 서기 5세기 후반, 그 영토의 남계(南界)가 경기도 남부 아산만 - 충청북도 충주 - 죽령 - 경상북도 울진을 연결하는 선으로 파악되며, 이 경우, 한반도의 3분의 2를 장악하고, 대한민국영토의 거의 절반을 장악한 것으로 이해되며, 이 시기의 고구러의 중심지(3경: 三京) 중 2경은 "한국"으로 분류되는 "평양"과 "재령"에 1경은 "압록강 유역"인 "지린성 지안"에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한반도 남부의 백제와 신라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특히 신라에 고구려군이 주둔했던 사실(新羅土內幢: 충주고구려비.)로 한반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그 것이 결국 고구려에 대한 한국의 봉건국가(통일신라, 고려, 조선 등.)에서 고구려를 한국사로써 파악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발해(渤海: 698 - 926.) 역시 그 발상지가 "고구려에 속한 속말말갈의 지역"으로써, 자신들의 정체성을 "부여"와 "고구려"에 두고 있었으며,(발해 무왕, 및 문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하여,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파악할 수 있는 "연"(燕), "제"(齊)와는 다른 위치의 국가였습니다.
대개 중국이, 앞서의 발췌문에서 언급하였듯, 소위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주장하고, 그 "다민족국가"를 기준으로 가상의 "중화민족"이라는 개념을 상정하여 이를 무리하게 영토문제 역사문제에 적용하는 현상이 "동북공정"의 실체로써, 개인적인 견해로 역사문제를 인식하는 데 있어 중국학계가 스스 정한 이 "원칙"을 이탈하여 "조금이라도 연관성이 있으면" 모두 중국사로 주장하는 경우가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대개 서적에서 고구려에 대한 귀속권을 주장하는 근거로 고구려를 "고이"(高夷)의 후예로 주장하고 한제국(漢: 206 B.C. - 220 A.D.)의 영토 내에서 건국되었다고 주장하여(그 주장이 허위과정성을 가진 여부는 둘째치더라도) 우선 고대사에서 "민족"과 "고대의 영토"를 강조하는 경우가 의심되며, 이것이 사실일 경우, "현대 중국영토"를 기준으로 중국사를 정의하는 것으로 스스로 정의한 "통일적 다민족국가론"과도 모순되는 결과가 나옵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견해로 "조금이라도 중국과 연관성이 추측"될 경우 중국사로 무분별하게 주장하는 "팽창주의"와의 연관성을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조공책봉"의 국제관계 역시 "실질적인 국가사회의 형성"과는 무관하게 중국의 봉건국가들의 "천하관"에 의해 "주관적 관점"에서 정의된 것으로써, 이 조공책봉체제를 이행한 국가들은 일련의 "외교질서"를 따른 것이고, 이것이 "속국"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으로 고구려 혹은 발해왕국의 독립성을 판단하는 것은 "현대 중국의 영토를 기준"으로 한다고 중국학계가 스스로 정의한 "통일적 다민족국가론"과도 모순됩니다.
정리하면, 중국의 "동북공정"이론은 "중국사회의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정의하고, 여기에 "민족"(중국학계에 의해 자의적으로 정의된), "과거의 영토", "과거의 외교관계"를 필요에 따라 추가하여 중국사를 정의하는 경우로써, 이것은 "현대 중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재의 영토"를 기준으로 하는 원칙을 이탈하여 "부문별한 역사해석"을 시도하는 경우로써, 명백한 "팽창주의"에 해당합니다.
(전략)
이와 같이 발해사와 고구려사 연구에 나타난 중국 학계의 특징은 자신의 논리가 일정 단계에 이르러 다음 단계로 나아갈 때는 지난날 자신이 비판했던 논리를 새로운 주장의 근거로 삼기도 한다는 점이다. [1]
(하략)
[1] 이개석 외4인 『중국의 동북공정과 중화주의』(서울:고구려연구재단, 2005).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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