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남침전쟁 중 "반공 유격대".(2019.5.22.) 발췌록

대개 "전쟁"은 전쟁당사국 내의 사회 전체가 "동원"되는 상황으로써, 전투를 직접 담당하는 "군사집단" 및 이를 "지원"하는 "비군사집단"으로 구체적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특히 행정, 교통, 통신기술이 발전하고 중앙집권적 국민국가체제 및 국민개병제로 대표될 수 있는 "근대"(近代)이후의 사회에서 전쟁은 특정 계층 혹은 지역의 문제가 아닌 국가전체의 문제, 더 나아가 초국가적인 문제로 직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6.25남침전쟁 역시 이런 "근대이후 형성된 배경"(국가총동원체제.) 이외에 현대사 초기에 등장하는 "냉전"(Cold War.)으로 명명되는 국제질서의 영향으로 남북한만의 문제가 아니라 남북한을 둘러싼 주변국가들 및 국제연합(UN) 차원의 문제로 인식되었으며, 이런 결과 국제연합군 및 중국인민지원군의 개입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휴전협정이 추진된 이유 중 하나가 이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수 많은 국가가 개입한 이 전쟁이 "세계대전"으로 비화될 위험성이 있었던 이유도 있습니다.

범위를 "한국 내"로 제한할 경우, 남침에 직면한 한국사회에서 이 6.25전쟁은 "군사집단"만의 문제가 아닌 국민 전체의 문제로 직결되었습니다. 우선 6.25의 동기가 이데올로기전쟁인 냉전과 연관되며, 북한정권의 소위 "국토완정"(國土完整: 일련의 적화통일.) 이데올로기에 의해 시작되었으므로, 점령지 주민에 대한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정책이 이루어진 측면이 있으며, 전쟁의 전장(戰場)이 사실상 한반도 전체에 걸쳤던 이유로 6.25는 당시 한국사회 전체의 이해관계와 연관된 전쟁이며, "사회사"(社會史)의 측면에서 이 전쟁이 한국사회에 끼친 변화는 매우 컸습니다.

이런 배경에 의해 북한의 남침과 북한의 점령지에서 대한민국 국민들의 저항심리가 "당연히" 발생하였으며, 이것이 그런 심리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 "반공, 반김일성"의 기치를 세우고 정치, 군사적 활동을 한 사례가 확인됩니다. 흔히 6.25전쟁기간중 한국영토 내의 지리산 등을 중심으로 활동한 "북한 공산주의 파르티잔"(공비.) 가 대표적으로 언급되어 대개 북한지향의 유격대가 있었던 것으로 간주되고 있으나, 서적 『6.25 바다의 전우들』에 그와 "반대되는" 상황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언급된 사례는 서적의 저자가 6.25전쟁을 "한국사회의 애국관이 총결집한 전쟁"임을 언급하는 내용의 중간에 있습니다.

6.25 전사를 조금만 고찰하면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북한 치하의 한국사회는 북한정권 혹은 북한군이 중심이된 소위 "개혁"의 대상이 되어, "의용군 강제징발", "식량공출", "인민재판"등의 혹독한 희생대상이 되었음을 언급하고 있으며, 이런 이유로 인명 재산의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반공, 반김일성정서가 형성되고 이것이 "반공 유격대" 형성의 배경이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현상이 이데올로기가 대립한 "냉전"의 부산물로써 생각할 수 있고, "반공 유격대"가 한국군 민 연합군과 연계되어 활동한 사례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실 이전에 북한군 점령과 통치의 문제점이 투영된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광복 후 북한에서 월남한 "월남민"들이나 6.25당시 북한 점령지에서 저항한 "유격대", 그리고 흥남철수작전(1950. 12. 15.)등으로 월남한 "월남피난민"의 "동기"와 현대 한국사회의 "북한이탈주민"의 "동기"의 유사성이 확인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북한지향의 유격대" 중심으로 사회에 인식된 6.25전쟁의 인식의 재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전략)
국군과 UN군 통제하의 유격부대와 반공이념으로 대공투쟁을 한 자생적 유격부대의 수는 약 40여개에 달했다.

○ 오대산 지구에서 적 유격대를 소탕한 호림부대
○ 장사동 상륙작전을 감행한 학도병으로 구성된 명부대
○ 백두대간에서 후퇴하는 패잔병을 소탕한 백봉부대
(중략)
○ 강화도 교동도 등 서해지역에서 활동한 제5816부대
(중략)
○ 백령도 및 황해도 옹진반도 일대에서 활약한 약 1만여 명의 동키(Donkey)부대와 제8240부대
(중략)

이 외에도 여러 유격부대가 평안남.북도를 연한 서해안 도서와 함경도를 연한 도서에서 싸웠다.
수 많은 유격용사들이 군번도 계급도 없이 오직 대한민국 존립을 위하여 대공유격전선에서 목숨 바쳐 싸우고 쓰러져갔다.
(하략)

최영섭, 『6.25 바다의 전우들』(서울:세창미디어, 2013). pp.263 - 264.

"휴전협상"중 "추가 북진계획".(2019.5.21.) 발췌록

국군 및 연합군의 "재반격작전"(1951. 2.) 개시 이후 전선이 다시 북상하면서 현재 휴전선과 비슷한 전선이 구축되고 있는 상황에서, 휴전회담이 서기 1951년 7월경 시작되었고, 이런 상황이 연합군의 "추가적인 북진"을 스스로 철회하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견해로, 전쟁의 당사국이었던 한국에게 있어 "휴전"은 "제2의 분단"이면서, 남침을 감행한 북한정권이 "존속"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정부차원에서 강력한 "휴전반대" 입장이 국내외적으로 표방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런 "배경"이 당시 한국정부(이승만대통령.) 주도로 "반공포로 석방"(1953. 6. 18.)이 기습적으로 추진된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주목할 것은, 서적 『6.25 바다의 전우들』에도 언급되었듯, 이 "휴전반대" 여론이 당시 한국사회의 "입장"이었던 것으로써, 물론 당시 한국정부의 방침이 정책적으로 알려진 측면도 존재하지만, 6.25전쟁을 유발한 북한에 대한 "반북"(反北)정서, 그리고 국가 존망여부에 대한 "위기"의 심리 역시 강하게 작용하였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대통령이 국군통수권자로써, 그리고 군사적 정서에 의하여 당시 한국군의 입장은 "휴전 결사반대"였고,(일선 전장의 장병들의 심리는 약간 차이가 있을 수 있음.) 서적 『6.25 바다의 전우들』의 저자 역시 그런 입장이었을 가능성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습니다. 서적 중간중간에 보이는 "휴전중 연합군의 추가적인 북진계획이 밴플리트 미8군사령관등에 의해 언급되었지만 리지웨이(당시 연합군 총사령관.)에 의해 무산되었다."라는 내용이 언급되어있는데, 개인적인 견해로 저자 역시 이런 입장을 강조하는 측면을 확인할 수 있다고 봅니다.

대표적으로 서적에서 언급된 추가적인 북진계획은 대개 2가지로 정리할 수 있는데, "전전선을 대동강 - 원산 선으로 북상"시키는 안 [1] 과, "중동부전선을 강원도 통천-평강 선으로 북상"시키는 안(현재의 휴전선보다 약 10km 북상.) [2] 이었는데, 연합군사령부에 의해 기각되었습니다. 더 이상의 확전을 방지하고 휴전의 국면에 집중하겠다는 입장을 연합군사령부에서 확인할 수 있으나, 추가적인 북진계획이 "휴전회담"에서 유리한 입장선점의 초석이 된다는 측면에서 개인적인 견해로 당시 국군 및 연합군의 추가 북진계획의 실행이 필요했다고 생각합니다. 휴전회담 진척되면서 전선이 교착되고 결국 "서울에서 불과 수십 킬로미터"거리에 휴전선이 위치하는 결과로 이어진 면은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긍정적인 결과는 아닙니다.

(전략)
밴 플리트 장군은 한국을 떠나면서 1951년 봄에 공산군을 괴멸시킬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을 몸시 아쉬워했다. 당시 병참(兵站) 한계에 직면한 중공군은 불시에 반격을 받고 궁지에 몰려 있었다. 밴 클리트 장군은 『라이프』지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쉽게 연승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워싱턴 당국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국무부는 우리가 38도선에서 멈출 것임을 공산군에게 미리 통보한 상태였다.
(중략)
그러나 우리의 정책결정자들이 허락만 한다면 신임 8군사령관인 테일러 장군은 나와 마찬가지로 쉽게 기회를 붙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극동에서 한국문제가 정치적으로 해결될 가망은 없었다.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자들이게 밀리면 우리는 결국 패배한 것이다. 두려울 게 무엇이란 말인가?"34  [3]
(하략)

[1] 최영섭, 『6.25 바다의 전우들』(서울:세창미디어, 2013). p.195.
[2] 같은 서적 p.219.

[3] 같은 서적 pp.224 - 225.
존 톨랜드, 김익희 역, 『6.25 전쟁』제2권, 도서출판 바움, 1991, p.402. 재인용.

1 2 3 4 5 6 7 8 9 10 다음